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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허락받는 것: <히말라야>로 본 고소적응과 희생의 철학(등반 윤리, 인간애, 희생)

by crewong 2026. 4. 23.

솔직히 저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주도에 갔을 때 "한라산은 꼭 가봐야지"라는 생각에 무작정 성판악 코스에 올랐다가, 발톱이 빠질 것 같은 통증에 "내가 왜 돈 쓰고 이 고생을 사서 하나"라며 저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 기억이 떠오른 건 영화 히말라야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한라산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8,000m급 봉우리를 오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싶었습니다.

영화 히말라야 대표 포스터

등반 윤리(Mountaineering Ethics): '정복'의 서사를 거부하는 산악인의 태도

영화에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산을 정복한다는 말 쓰지 마라." 히말라야 14좌, 즉 해발 8,000m 이상의 봉우리 열네 개를 완등한 산악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무게가 남달랐습니다. 여기서 히말라야 14좌란 에베레스트(8,849m), K2(8,611m), 칸첸중가(8,586m) 등 히말라야·카라코람 산맥에 위치한 세계 최고봉 열네 개를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전 세계에서 이 14좌를 모두 오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산은 정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들

 

30대 직장인으로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경쟁에서 이기고 목표를 '탈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엔 "산을 정복하면 안 된다"는 말이 쉽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직접 성판악 코스를 걸으며 느꼈던 것은, 산은 제가 원한다고 마음대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날씨, 체력, 운, 그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 정상에 설 수 있었고, 그것은 허락에 가까운 경험이었습니다.

 

등반 윤리(Mountaineering Ethic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등반 윤리란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동료를 버리지 않으며, 공정한 수단으로 등정하는 원칙을 의미합니다. 엄홍길 대장이 훈련 중에 무택과 정복에게 쓰레기를 직접 등에 지고 내려오게 한 장면은 바로 이 등반 윤리를 몸으로 가르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제게는 단순한 훈련 묘사가 아니라, 산을 대하는 태도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산악인들이 실제로 지켜야 할 핵심 등반 원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환경 훼손 금지: 쓰레기 반출 및 훼손 행위 자제
  • 동료 안전 우선: 등반 중 대원 간 상호 확보 의무
  • 기상 판단 존중: 악천후 시 무리한 정상 공격 자제
  • 조난자 구조 의무: 국적 불문 조난 신호 청취 및 대응

실제로 대한산악연맹은 히말라야를 포함한 고산 등반 시 이러한 원칙의 준수를 권고하고 있습니다(출처: 대한산악연맹).

데스존(Death Zone)의 생리학: 고소적응을 포기한 원정대의 의학적 희생

칸첸중가 등반 당시, 엄홍길과 박무택이 가파른 빙벽에서 비박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비박(Bivouac)이란 텐트 없이 침낭이나 얇은 방한 장비만으로 혹한의 야외에서 밤을 버티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영하 30도가 넘는 절벽에서 몸 하나만 의지해 아침을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그 혹독한 시간을 함께 버텨내는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싹트는 장면은, 저에게 인간관계의 본질이 결국 함께 버틴 시간에서 나온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박무택이 에베레스트에서 동료를 구하다 시력을 잃고 하산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그 밤 영하 40도의 암흑 속에서 혼자 산을 오른 박정복의 뒷모습은, 제가 영화를 보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형태의 사랑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위한 희생은 어떤 말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몸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분석 항목 일반적인 등정 (성취 지향)
휴먼 원정대 (가치 지향)
주요 목적 정상 정복 및 최단 시간 완등
동료의 시신 수습 및 약속 이행
핵심 기제 철저한 고소적응과 체력 안배
목숨을 건 데스존 재진입과 희생
주요 장애 기상 악화 및 고산병 위협
신체적 부상과 의학적 한계 돌파
등반 철학 인간 지성의 승리 (정복)
산과 동료에 대한 예우 (등반 윤리)

 

사망 후 엄홍길은 다리 부상을 안고 시신 수습 원정대를 꾸립니다. 고소적응(Acclimatization)이 필요한 8,000m급 고산에서 57일간 수색을 이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소적응이란 고도가 높아질수록 감소하는 대기 중 산소 분압에 인체가 서서히 적응하는 과정으로, 이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으면 고산병(Altitude Sickness)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통증을 진통제로 누르며 수색을 계속한 원정대원들의 행동은, 의학적으로도 목숨을 건 선택이었습니다.

기록(Record)에서 관계(Relationship)로: 16좌 완등의 진정한 동력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의 고산병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해발 8,000m 이상 구역은 데스존(Death Zone)으로 분류되며 이 구간에서 장시간 체류하면 신체 기능이 급격히 저하됩니다(출처: WHO). 엄홍길 대장이 다리가 부서지더라도 동생들을 데려오겠다며 데스존으로 다시 발을 디딘 이유는, 기록이나 명예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성판악 코스를 오르며 느꼈던 것은, 한라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보다 그 고통 속에서 옆에 있어준 일행의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면 히말라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산이 기억되는 것은 높이가 아니라, 그 위에서 함께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엄홍길 대장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그가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체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떠난 동생들이 그의 허파와 다리가 되어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말라야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요즘 인간관계에 지쳐 있다면, 그냥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이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그게 이 영화의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FUHxaPha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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