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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의 절제미와 유해진의 처연함,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슬픔의 구조' 분석(장항준, 유해진, 단종)

by crewong 2026. 3. 3.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극장 문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언가가 묵직하게 남아 있는 경험을 해보셨나요? 저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나서 정확히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조선시대 최대 정변 이후, 역사책에서는 단 몇 줄로 정리되는 단종의 마지막 4개월을 이토록 인간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장항준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화려한 권력투쟁 대신, 영월이라는 변방에서 백성과 함께 살아가는 어린 왕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했습니다.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사극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애도'를 다룬 휴먼 드라마였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대표 포스터

장항준 감독은 왜 계유정난을 버렸을까

많은 분들이 단종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아마도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치는 그 피비린내 나는 정변의 순간일 겁니다. 그런데 장항준 감독은 과감하게 그 모든 스펙터클을 걷어냈습니다. 계유정난은 물론이고 수양대군조차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 이 선택을 듣고 의아했습니다. 관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을 왜 포기했을까요?

 

감독의 답은 명확했습니다. "굳이 이미 훌륭하게 그려진 장면들을 다시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계유정난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는 이미 충분히 많습니다. 대신 그는 역사의 뒷면, 즉 권력을 빼앗긴 어린 왕이 백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측면에서 매우 독특한 선택입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를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전개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틀을 말하는데, 보통 사극은 사건 중심의 선형 구조를 따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건을 과감히 생략하고 인물의 내면과 관계에 집중하는 캐릭터 중심 구조를 택했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고문 장면'으로 들어간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사극이라면 왕이 되는 과정,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줬겠지만, 이 영화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부터 시작합니다. 초반의 고문 장면으로의 급격한 전개가 배경지식이 부족한 관객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관객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단종이 어떻게 죽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장항준 감독이 의도한 '슬픔의 구조'였습니다.

유해진과 박지훈, 부자 관계로 완성된 감정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축은 단연 유해진이 연기한 어몽도와 박지훈의 단종 사이에 형성되는 부자(父子) 같은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몽도는 영월 관아의 말단 통인으로, 유배 오는 귀족들을 맞아 돈을 뜯어내는 일종의 장사꾼입니다. 그에게 단종은 처음엔 그저 '골칫덩어리 손님'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 둘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이 쌓입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유해진 박지훈 부자 같은 관계를 이루는 장면

 

저는 특히 '밥'이라는 소재가 이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사용된 점이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쌀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권력이자 생존의 상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평생 쌀밥을 먹어보지 못했고, 특히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영화에서 단종이 처음에는 밥을 거부하다가 점차 맛있게 먹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직접 묵국을 만든 '막둥 어멈'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장 서사입니다.

 

이는 푸드 시네마토그래피(Food Cinematography)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접근입니다. 푸드 시네마토그래피란 음식을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캐릭터의 감정과 관계를 표현하는 영화적 장치로 활용하는 기법을 말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유해진 배우의 연기는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특히 혼잣말 연기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습니다. 다리 위에서 혼자 말을 타는 시늉까지 하며 유배 오는 대감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극장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처연함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웃기는 캐릭터가 아니라,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는 조선의 백성 그 자체였습니다.

 

박지훈 배우 역시 놀라웠습니다. 20대 중반의 아이돌 출신 배우가 이토록 처연하고 품위 있는 왕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눈빛은 전반부에는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하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결연함으로 바뀌는데, 그 전환이 전혀 작위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관아에서 어몽도의 아들 태산이가 곤장을 맞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단종은 처음으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한명회(유지태)의 서슬 퍼런 압박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집니다. 이 장면 이후, 태산이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감독은 이 순간 어몽도의 진짜 아들 역할을 단종이 대신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몽도에게 단종은 지켜야 할 자식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시신을 수습하는 행위가 설득력을 갖는 겁니다.

클라이맥스, 눈물이 아니라 침묵으로 애도하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클라이맥스입니다. 단종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이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었습니다. 많은 사극들이 이 순간을 자극적으로 그려내곤 합니다. 목이 졸리는 장면, 발버둥 치는 모습, 고통스러운 표정 등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냅니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단종의 죽음을 직접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문 밖에서 무너져 내리는 어몽도의 모습, 그리고 극도로 절제된 눈과 손의 클로즈업만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선택이 영화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옵-스크린(Off-screen) 기법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옵-스크린이란 화면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연출 기법으로, 오히려 화면 안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픔은 밖에 있는 사람들만 느꼈으면 좋겠다. 그분이 가시는 장면을 보는 것 자체가 애도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말이 저는 정말 와닿았습니다. 죽음을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감독의 윤리적 태도가 느껴졌습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분석 항목 영화 속 설정 및 연출
비평적/예술적 의미
서사 구조 캐릭터 중심의 비선형 구조
사건의 자극성을 배제하고 인물의 내면에 침잠
상징 매개체 쌀밥과 묵국 (음식)
권위의 해체와 인간적 유대감의 형성 과정
연출 기법 옵-스크린 (Off-screen)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윤리적 애도의 방식
시각적 대비 흐린 날의 시신 수습 (Daylight)
낭만화를 배제한 역사의 무게와 현실적 비극성

 

유해진 배우는 이 장면을 찍을 때 분장실에서부터 울었다고 합니다. 아직 촬영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는 겁니다. 현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고, 스태프들도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고 합니다. 감독조차 "한 번 더 찍자"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이 장면은 배우에게도, 스태프에게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신 수습 장면. 원래 이 장면은 밤 장면으로 기획되었다가 낮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감독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시신을 수습하는 게 더 처연하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촬영 당일 해가 제대로 뜨지 않아 감독은 내심 아쉬워했지만, 저는 오히려 그 흐린 날씨가 더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의 죽음은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흐린 하늘 아래, 묵묵히 시신을 거두는 어몽도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단종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열여덟 살 소년의 마지막 순간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한 백성의 마음도요. 장항준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자신이 단순히 '유쾌한 입 담꾼'이 아니라 진지하고 섬세한 연출자임을 증명했습니다. 특히 배우들과의 소통 방식, 리허설 없이 날것의 연기를 끌어내는 연출력, 그리고 역사를 대하는 윤리적 태도는 많은 후배 감독들이 배워야 할 지점입니다.

 

올해 한국 영화계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만큼,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다시 극장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품이 되길 기대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8nrGFUn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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